國寶 바라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 (국보 8건- 94,95,96,97,98,99,100,104)

연꽃마을 2012. 6. 28. 16:12

국보 94호 청자 참외모양 병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고려 인종(仁宗)의 릉에서 발견. 참외 모양의 몸체에 꽃을 주둥이로 삼아 표현한 매우 귀족적인 작품으로 긴 목에 치마주름 모양의 높은 굽이 받치고 있는 단정하고 세련된 화병이다. 담록색이 감도는 맑은 비색 유약이 얇고 고르게 발라져 있다. 참외모양 화병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국보 95호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청자 향로, 뚜껑은 향이 피어올라 퍼지도록 뚫어서 장식한 구형(球形) 부분과 그 밑에 받침 부분으로 되어 있다. 구형 부분 곳곳의 교차 지점에는 흰 점이 하나씩 장식되어 있다. 몸통은 두 부분으로 윗부분은 둥근 화로 형태인데, 몇 겹의 국화잎으로 싸여있고 다시 커다란 국화잎이 이를 받치고 있다. 아래 부분은 향로 몸체를 받치고 있는 대좌로, 3 마리의 토끼가 등으로 떠받들고 있다. 대좌의 옆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토끼의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나타냈다. 유약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광택이 난다. 이 작품은 상감청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 청자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적인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 있는 뛰어난 청자 향로이다

 

 

국보 96호 청자 구룡형 주전자

고려 청자 주전자로, 연꽃 위에 앉아있는 거북을 형상화했는데 물을 넣는 수구(水口), 물을 따르는 부리, 몸통, 손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얼굴 모습은 거북이라기보다 오히려 용에 가깝다. 이마 위의 뿔과 수염, 갈기, 눈, 이빨, 비늘 등이 모두 정교하면서도 부드럽게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졌다. 두 눈의 눈동자는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점을 찍었으며, 아래와 위의 이빨은 가지런하게 표현되어 있다. 목과 앞 가슴의 비늘은 음각했으며, 발톱은 실감나도록 양각해 놓았다. 등에는 거북등 모양을 새겨 그 안에 왕(王)자를 써 넣었고, 등 뒤로 꼬아 붙인 연꽃 줄기는 그대로 손잡이가 되도록 만들었다. 거북등 중앙에는 섬세하게 표현된 작은 연꽃잎을 오므려 그곳에 물을 담도록 되어있다.

 

 

국보 97호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고려시대 . 이 매병은 작고 야트막하나 야무진 아가리와 풍만한 어깨와 몸통, 잘록한 허리, 그리고 아래부분이 밖으로 약간 벌어진 곡선에서 전형적인 고려자기 임을 알수 있다. 아가리는 일반적인 매병 양식으로 각이 져 있으며 약간 밖으로 벌어졌다. 몸통에는 연꽃덩굴 무늬가 전면에 힘차고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맑고 투명한 담록의 회청색 청자유가 전면에 고르게 씌워져 있으며, 표면에 그물 모양의 빙렬(氷裂)이 있다. 유약의 느낌이나 작품의 모양새를 보면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가마에서 구워 냈을 것으로 추정.

 

 

국보 98 청자 상감 모란문 항아리

고려시대 청자 항아리. 몸통에는 앞뒤로 모란이 한 줄기씩 장식되어 있다. 모란꽃은 잎맥까지도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몸체의 한 면마다 가득히 큼직한 문양을 넣어 인상적이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특히 꽃은 흰색으로 잎은 검은색으로 상감하였는데, 꽃을 중심으로 잎을 좌·우·상·하로 대칭되게 배열하였다. 유약은 맑은 녹색이 감도는 회청색으로 매우 얇고 고르게 칠해져 있다.

면상감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상감기법의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손잡이 부분

 

 

국보 99호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서 동서 석탑을 모두 찍어 봤다.

 

 

 

 

국보 100호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국보 104호 傳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 탑

전(傳)흥법사 염거화상탑은 원래 위치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로 기록되어 있지만, 증명할만한 자료가 부족하여 현재는 탑 이름 앞에 전(傳)자를 붙여 부르고 있다.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이 탑은 탑골공원에 있던 것을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다. 

도의선사의 제자인 염거화상(?∼844)은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면서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다가, 체징에게 그 맥을 전하여 터전을 마련한 뒤 844년에 입적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의 설명이 좋아서 추가해 봅니다

통일신라 선승(禪僧), 염거(廉居)를 기리는 탑과 기록:   강삼혜

박물관 열린마당에 들어서면 건물 벽을 따라 석조미술품 정원이 펼쳐집니다. 모두 국보 보물인 명품 전시품들 중 가장 먼저 만나는 석조미술품은 염거화상(廉居和尙, ?~844)을 기리는 탑입니다. 이 탑은 우리나라 ‘팔각집모양’ 승탑의 전형을 완성한 탑으로, 석조미술사 책에서 언제나 서두에 등장하곤 합니다. 이 탑을 옮길 때 함께 나온 금속으로 만든 탑지(塔誌)는 염거화상의 입적 연대와, 탑을 제작하고 발원한 이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염거화상탑은 지대석과 하대석 일부를 잃어 밑부분 마감이 허전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의 조각 솜씨와 전체 조형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탑 기단부는 밑에서부터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대석 8면에는 사자가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고, 중대석 각 면에는 안상(眼象)과 안상 내부에 향로와 꽃무늬 등을 돋을새김하였습니다. 상대석에는 위를 향하여 핀 아름다운 연꽃잎이 이중으로 탑신부를 받치고 있습니다.

기단부 위로 올라오면, 탑신받침 위에 팔각 탑신이 놓여 있습니다. 탑신에는 목조 건물처럼 기왓골과 서까래가 표현된 지붕과 처마, 앞뒤 문과 자물쇠, 기둥과 상인방, 창방 등 각 부재 표현과 더불어, 비천(飛天)과 사천왕(四天王) 부조상 등으로 장엄되었습니다. 부조 조각들은 뛰어난 조각 솜씨도 놀랍지만 승탑의 조형이념을 말해 주는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어 우리의 시선을 더욱 잡아끕니다.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이후 제석, 범천도 등장)상은 통일신라 9세기 중반부터 고려 전기 11세기 초인, 승탑에서 뛰어난 예술성이 발휘되던 시기에 주로 등장하는 부조상이라 승탑의 시대를 말할 때 하나의 기준으로도 삼을 수 있습니다.

문성왕이 발원한 탑지

일제강점기인 1911년경 일본인 골동상인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는 원주 흥법사 터에 있던 염거화상탑을 서울로 가져옵니다. 탑을 옮기면서 탑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데라우치 조선총독이 염거화상탑을 구입하여 탑골공원에 두었다가, 1930년대에 공원을 정비하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 뜰로 옮겨 오게 됩니다. 이전을 앞두고 박물관 관계자였던 오가와 게이치[小川敬吉]는 지대석과 하대석이 없는 게 아쉬워 염거화상탑을 운반한 관계자에게 문의를 합니다. 그에게서 탑을 옮길 당시 지대석과 하대석이 너무 커서 운반하기 어려워 두고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오다와는 1929년 3월 18일부터 29일까지 원주 흥법사 터를 조사합니다. 두고 온 부재는 결국 찾지 못했지만, 출장보고서에 당시 상황을 남겼습니다.

염거화상탑지에는 48자의 쌍구체 글자가 조금(彫金)기법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조금기법은 금속 표면에 정이나 끌로 두드려 음각으로 글자를 새기는 기법입니다. 품위 있는 쌍구체로 조각된 탑지는 염거화상탑의 제작 시기와 조형미의 비밀을 말해 주는 단서를 품고 있습니다.

탑지의 내용은

회창 4년(844년) 갑자년이던 해

9월29일에 돌아간

염거화상의 탑으로 석가모

니불이 열반에 든지 `804

년이 지나서인데

이 나라 경응대왕(문성왕) 때이다.

 

 

참고로 염거화상의 스승인 도의선사의 탑도 올려봅니다

진전사지 승탑(염거화상의 스승인 도의선사탑 추정), 통일신라 9세기, 높이 3.17m, 보물 제439, 강원도 양양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는 염거화상의 스승인 도의선사의 탑이 있습니다. 도의선사는 중국에서 처음 선종(禪宗)을 배워 와 통일신라에 뿌리내리게 한 우리나라 선종의 초조(初祖)입니다. 821(헌덕왕 13)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경주에서 선법을 펼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 머물며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받아 선문(禪門)이 번창하였습니다. 그의 선맥은 2대 제자인 염거화상에게 전해졌습니다.

진전사 도의선사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승탑으로 생각됩니다. 승려의 탑을 처음 만들면서 통일신라 석공들은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부처의 탑인 불탑과는 달라야 했기에 기단은 석탑처럼 2층으로 만들면서, 그 위 탑신부는 석등 모양을 빌려 팔각 건물 형태로 세웠습니다. 이처럼 승탑의 초기 형태는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내려는 작가의 고민을 통해 새롭게 창안되었습니다.

이후 2대조사인 염거화상의 탑을 만들 때는 사각 탑 기단부 대신 불상의 팔각 대좌를 선택하여 탑신의 팔각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고, 부처와 불법을 호위하는 사천왕상을 탑신에 새겨 승려를 부처와 같이 받들고자 한 당대의 신앙심을 반영하였습니다. 사천왕이나 사자 부조상은 부처와 관련된 곳에만 사용하던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승려의 탑에 사용했다는 것은 승려를 부처와 같이 섬겼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승려를 부처와 같이 받들다

승탑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으로 조성된 것이지만 이곳에 잠든 승려가 곧 부처님이라는 조형 이념으로 세워진 기념물입니다. 탑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이를 말해주고 있지만, 부처님을 호위하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사천왕상을 승탑에 조각한 것도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은 불탑이나 사리기에 새겨진 사천왕과는 달리 왕의 무덤 호석에 새겨지는 12지신상과 같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무장(武裝)한 갑옷 안에 입은 포()의 넓은 소맷자락이 팔뚝을 감싸며 내려오고, 끝이 말린 소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표현은 능묘 12지신상에서 주로 보입니다. 탑이나 사리기 사천왕상의 경우는 넓은 소맷자락 표현된 예가 하나도 없습니다. 염거화상탑의 서방 광목천상과 경주 능지탑 유상(酉像)은 특히 더 비슷하며, 이러한 소매 표현은 경주 창림사 터 삼층석탑 팔부중에서도 보입니다. 창림사 터 팔부중상은 855년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이 발원한 무구정탑(無垢淨塔) 팔부중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염거화상탑의 서방 광목천상

염거화상탑은 사천왕 부조상이 새겨진 첫 번째 승탑으로, 능지탑 등 경주 왕릉 12지신상과 자세나 조각 솜씨가 유사하여, 왕릉 석물을 만들던 국공(國工)이 만든 승탑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승탑과 함께 세우는 탑비(塔碑)의 경우 당시 왕의 허락이 있어야 세울 수 있었으며 왕이 지정한 문사(文士)가 비문을 지었던 것으로 볼 때, 승탑 제작에도 국공이 참여하여 이처럼 뛰어난 조형미를 이룩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승탑과 탑비가 국공이 만든 것임을 탑비의 비문에 기록으로도 남기는데,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탑(고려 977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렇듯 염거화상탑 제작에 국공이 참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조각 표현에서만이 아닙니다. 염거화상탑에서 나온 탑지에서도 왕과 관련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