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 바라기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蔚州 川前里 銘文과 岩刻畫)

연꽃마을 2024. 11. 9. 20:34

 

1973년 5월에 국보로 지정되었을 때 147호였습니다.

큐알코드를 찍어서 공룡체험을 먼저 해보았습니다.

 

~설명은 국가유산청에서 퍼왔습니다~

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에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새겨진 암석으로, 아래 ·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설명이 좀 재미없군요.

유튜브의  "KBS 역사스페셜 '누이를 사랑한 왕자, 천전리 각석의 비밀"의 내용을 중심으로 적어보려합니다.

각석이란 글자나 그림이 새겨진 암석을 말합니다. 이것은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인데 그림은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것이고 글씨는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주로 신라 화랑들이 찾아 왔다가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이 있는데, "법민랑"이라는 문무왕의 화랑시절 이름도 있습니다.  먼저 새겨진 문장(원명)의 내용은,

"을사년 (525년(신라 법흥왕 때) 6월18일 새벽, 갈문왕이 놀러 왔다가 이름 없는 이 골짜기를 '서석곡'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갈문왕이란 왕의 혈족(형제같이 가까운 혈육)에게 주어지는 명칭입니다. 이 갈문왕은 '사부지갈문왕(사부지의 한자 말은 입종입니다. 이사부(이사=이끼=태)=태종, 거칠부=황종), 즉 입종갈문왕이지요. 갈문왕과 함께 놀러 온 사람은 우매(친구 같은 누이)어사추여랑(왕)이었습니다.  '왕'은 존칭어로 '님'과 같은 말입니다. 입종갈문왕(사부지 갈문왕)은 친구같은 누이, 사냥을 즐기거나 음식을 한 사람의 이름까지 방명록을 써 놓은 셈입니다.  입종갈문왕은 당시 왕이었던 법흥왕의 동생입니다. 

그러나 사부지갈문왕은 그 누이와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왕위 계승 문제를 생각하여 자기 딸과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을 결혼 시켰습니다. 그 부인이 지몰시혜비(지소부인)입니다. 즉 갈문왕은 자기 조카(형의 딸)와 결혼하여 삼맥종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갈문왕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놀러왔던 어사추여랑도 죽었습니다.  539년, 어린 삼맥종을 데리고 법흥왕비와 지소부인(삼맥종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이 갈문왕을 그리워하며 이 골짜기에 와서 추명을 새겼습니다.

삼맥종은 진흥왕입니다. 갈문왕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은 신라를 크게 융성시킨 왕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