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 바라기

광주와 나주의 국보 3건(103, 143, 295호)

연꽃마을 2016. 10. 8. 15:14

국보 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光陽 中興山城 雙獅子 石燈)

 

국립 광주박물관에 있어요. 설명들은 문화재청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 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을 이루는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이 석등은 큼직한 연꽃이 둘러진 아래받침돌 위로 가운데기둥 대신 쌍사자를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두 마리의 사자는 뒷발로 버티고 서서 가슴을 맞대어 위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8각의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이 뚫려 있고,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장식이 번잡하지 않아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수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조각기법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는 걸작이라 하겠다. 원래는 중흥산성내에 있었으나, 일본인이 무단으로 반출하려 하여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다가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석등인데 실내에 있으니 그냥 전시품 같네요.

아무리 배경을 산처럼 흉내내어도 역시 있을 곳에 있어야 제 맛이 나는 듯합니다. 어찌됐든 아름다운 석등입니다.

사자 두 마리는 머리결 모양도 다르고 꼬리 모양도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요.

내가 사자를 볼 때는 입모양을 자세히 봅니다. 보통 한 쪽은 입을 다물고 있고 한쪽은 벌리고 있지요. 산스크리스트어로 첫 글자 "아" 와 끝 글자"훔"을 말하고 있대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을 나타낸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네요. 보통 금강역사들의 모습도 그러하지요.

  담양 개선자지 석등을 보고, 도갑사로 가는 길에 "국립나주박물과 8㎞" 표지판이 눈에 띄어 국보 2건을 득템했어요.

 이런 것이 자가 운전으로 답사 다니는 이의 기쁨이지요 ㅎㅎ

 

 

국보 143호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和順 大谷里 靑銅器一括)

 

국보 143호는 나주박물관에서 보았는데 문화재청에는 광주박물관에 있다고 써 있네요. 전화해서 확인해 봐야겠어요.

전라남도 화순군 대곡리 영산강 구릉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출토된 청동기 유물 중 세형동검(청동검) 3점·청동팔령두 2점·청동쌍령구 2점·청동손칼(청동삭구) 1점·청동도끼(청동공부) 1점·잔무늬거울(청동세문경) 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세형동검은 양 끝에 날이 서 있으며, 그 중 1점은 칼날 부분이 손상되어 있다. 동검 중앙에 굵게 나온 등대의 모습이 칼마다 다른 것이 특징이며, 한국에서 출토되는 동검으로는 시대가 늦은 편이다.
청동팔령구는 8각형의 별모양으로 생겼으며, 각 모서리에 방울이 달려 있다. 그 안에 청동구슬을 넣어 흔들면 소리가 나는 것으로, 주술적·종교적인 의식용 도구로 보여진다. 방울 표면에는 고사리문양이 나타난다. 청동쌍령구는 양끝에 방울이 있고 그 안에 청동구슬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나는 주술적·종교적인 의식용 도구이다. 청동손칼은 공구류의 일종으로, 현재 조각칼의 용도로 보이는 것이다. 바닥은 평평하고 날의 끝이 일부 부러진 모습을 한다.
청동도끼는 한쪽면에 날을 세우고, 반대쪽에 자루를 끼울 수 있게 홈이 파인 형태의 도끼이다. 홈이 파인 쪽에는 어깨가 있으며, 폭에 비해 길이가 짧다. 잔무늬거울은 거울면에 광택있는 녹으로 되어 있어 깨끗하며, 거울 뒷면에 기하학적인 문양과 거울을 매달 때 사용하는 두 개의 뉴가 달려 있다.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유물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제작기법이 뛰어나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팔령구는 모사품이라고 써 있었어요.

다음 사진은 문화재청 사진입니다

 

 

 

국보 295호 나주 신촌리 금동관 (羅州 新村里 金銅冠)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높이 25.5㎝의 금동관이다. 나주 신촌리 9호 무덤은 1917∼1918년에 일본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금동관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대륜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 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내관인 모자는 전북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와 일본에서도 비슷한 것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 교류 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수 없다

 

 

 

 

아래 사진은 네이버에서 퍼왔어요.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서.......요런 것 올려 주신 분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