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죽서루는 2023. 12. 28.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퍼온 설명입니다.
삼척 죽서루는 고려 명종(1171∼1197)대에 활동하였던 김극기(金克己, 1148∼1209)가 죽서루의 풍경을 읊은 시 등을 통해 적어도 12C에는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서루(西樓)’로 불리다가 14C후반에 들어서 ‘죽서루(竹西樓)’라 불리기 시작했다. 또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죽서루단청기(竹西樓丹靑記)』(1472), *허목(許穆, 1595∼1682)의 『죽서루기(竹西樓記)』(1662) 등에서 ‘1403년 부사 김효손(金孝孫, 1373∼1429)이 옛터에 새로 창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전기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되었으나 관련 기록이 잘 남아있으며, 조선후기 증축된 이후 그 본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 허목은 ‘죽서루(竹西樓)라는 이름은 동쪽에 죽장사(竹欌寺)라는 절이 있어서 그 서편에 위치한 누각이다’라는 뜻으로 붙었다고 소개
삼척 죽서루는 1403년 정면 5칸(측면 2칸)의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칸)이 증축되었고,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칸)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중앙 5칸과 조선 중기 이후 확장된 좌ㆍ우측 1칸은 기둥 배열, 가구의 짜임, 천장과 바닥면의 처리, 공포 및 세부 의장 등에서 각 시기별 건축적 특징을 달리 보여주고 있다.
삼척 죽서루의 기둥은 절반 이상이 자연 암반 위에 올라서 있다. 22개의 기둥 중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기둥이 13개이고, 9개는 자연석 초석을 두고 받쳤다. 증축한 남쪽 한 칸은 바닥에 마루를 깔지 않고, 자연의 암반을 그대로 둔 채 출입을 돕기 위해 가운데 한 칸 부분만 고르게 다듬은 돌을 깔았다. 내부는 벽과 창호가 없는 개방된 평면으로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어 보이는 연등천장과 우물정자 모양으로 마감된 우물천장으로 설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정자 모양의 귀틀(나무틀)에 짧은 판재를 끼워서 바닥을 구성하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는데, 바깥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삼척 죽서루에는 조선 숙종(肅宗)과 정조(正祖)의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하여 유명한 시인과 명신들의 한시가 새겨진 현판이 많았으나, 1959년 태풍 사라의 영향으로 많이 유실되고 현재는 28점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죽서루의 절경을 표현한 정철의『관동별곡(關東別曲)』등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인, 묵객 등 다양한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수많은 시문, 가사 등을 남겼다. 죽서루의 정면에 걸린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현판은 1710년(숙종 36)에 삼척 부사로 왔던 이성조(李聖肇)의 글씨이다. 삼척 죽서루를 표현한 그림도 많이 남아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있는 죽서루의 그림이다. 이외에도 김홍도(金弘道, 1745∼),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도 그림을 남겼다.
삼척 죽서루는 각종 기록을 통해 중창과 후첨된 건립연대가 명확하여 역사적 가치가 크고, 조선 초기와 중기 이후의 건축 원형을 잘 유지하면서 건축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며, 수많은 명사들의 시문과 그림이 많이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 또한 크다. 더불어 오십천과 어우러진 죽서루의 경관이 빼어난 점 등을 고려할 때 국보(國寶)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안내판 내용입니다.
정부는 1991년 2월을 우리나라 가사문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달로 정하고 기념 표석을 두 개 세웠는데 하나는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척의 죽서루 경내이고, 다른 하나는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의 식영정 부근이다. 높이 3m의 8각 대리석으로 기단의 둘레가 2.4m인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석은 종전의 일반적인 시비(詩碑)와는 달리 팔각형의 장재 표석과 8각형의 기단으로 이루어졌는데, 기단 8각의 각 면마다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手決), 세움말, 가사 창작의 배경 등을 담아 송강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미니 박물관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가운데 5칸은 주심포양식이며, 양쪽의 1칸은 익공 양식입니다.
출입구쪽 난간은 평난간이고, 그 외의 난간은 계자난간입니다
자연암반과 자연초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웠습니다.
죽서루는 정면 7칸, 남측 3칸, 북측 2칸 겹처마 팔작지붕 형태입니다.
천장은 우물천장과 연등천장 모양입니다.
關東仙界陟州樓(관동선계척주루) 관동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척주의 누각
虛檻憑危夏亦秋(허함빙위하역추) 빈 난간에 위태로이 기대니 여름 또한 가을 같구나
天上玉京隣北左(천상옥경인북좌) 하늘 위 옥황상제 궁전이 북쪽 왼편에 이웃해 있고
夢中銀潢聽西流(몽중은황청서류) 꿈속에서 은하수 서쪽으로 흐르는 소리 들리네
疏簾欲捲露華濕(소렴욕권로화습) 성긴 주렴 걷으려 하니 영롱한 이슬에 젖어있고
一鳥不飛江色愁(일조불비강색수) 새 한 마리 날지 않으니 강물 빛은 수심에 잠겼네
欄下孤舟將入海(난하고주장입해) 난간 아래 외로이 떠있는 배 바다로 들려 하는데
釣竿應拂鬱陵鷗(조간응불울릉구) 낚싯대 던지니 놀란 갈매기 울릉도로 날아가네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돌 다듬고 절벽 쪼아 세운 누각 하나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누각 앞은 푸른 바다 해변에는 갈매기 노니네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죽서루에 있는 수령은 뉘 집 아들인가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미녀들 가득 싣고 밤 새워 뱃놀이하겠구나
第一溪亭(시냇가에 있는 첫째 가는 정자) 현종 3년(1662)에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68세 때 쓴 글씨
"해선유희지소" 헌종 3년(1837) 삼척도호부사 이규헌의 글씨
오죽입니다. 색깔에 따라서 자라는 순서를 알 수 있습니다.
복원해 놓은 삼척도호부 객사(진주관)의 모습입니다.
죽서루는 삼척도호부의 객사인 진주관의 부속 건물입니다
허목 선생의 죽서루기
『동계(東界)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 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嶺)을 제외하면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奇)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한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다 물이 큰 못같이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이 우뚝 솟기도 하고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 북쪽 지역으로부터 기성(箕城) 남쪽 경계지역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그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큰 하천이 동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관부(官府)의 고사(故事)를 살펴보아도 죽서루를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 3)에 부사 김효종(金孝宗)이 폐허화된 옛 터를 정비하여 이 죽서루를 건립하였고, 홍희(洪熙) 원년(1425, 세종 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하였다. 그 46년 뒤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 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하였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 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덧대어지었고, 또 그 61년 뒤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 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 대인 영락 원년(1403) 계미년(癸未年)부터 지금 강희(康熙) 원년(1662, 현종 3) 임인년(壬寅年) 까지는 260년이나 된다. 죽서루 아래에는 옛날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기록하여 죽서루기(竹西樓記)로 한다.』
김홍도 죽서루 그림 :금강사군첩 제1권에 11번째로 실려 있는 죽서루 그림
죽서루 그림은 죽서루의 정면 오십천 건너편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그린 형태이다. 하단부는 굽이쳐 흐르는 오십천의 풍광과 여유롭게 유선을 타며 노니는 선비들의 모습, 죽서루에서 오십천을 가로질러 있는 긴 줄이 그려져 있다. 그림 가운데에는 가파른 절벽과 절벽 위의 죽서루 모습이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응벽헌을 비롯한 삼척 관아 건물, 오른쪽에는 연근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응벽헌 왼쪽으로는 가야산으로 추정되는 높은 산봉우리가 둘러쳐 있고, 죽서루 뒤로는 오십천이 지금의 삼척 시가지 쪽으로 굽이쳐 흘러 내려가는 모습과 산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뒤로는 옅은 물안개를 묘사하여 동해 바다를 연상시키게 한다.
강세황 그림
엄치욱 그림
‘죽서루’ 그림(32.3×57.8㎝) 겸재 정선(1676~1759년)이 63세(조선 영조 13년. 1738년)) 간송미술관 소장
'國寶 바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0) | 2024.05.12 |
---|---|
김정희 필 세한도 (金正喜 筆 歲寒圖) (0) | 2024.03.10 |
부안 내소사 동종 (0) | 2024.03.10 |
토우 장식 장경호(긴목 항아리 ) 국보 195호 (0) | 2023.06.16 |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慶州 天馬塚 障泥 天馬圖)국보 207 (0) | 2023.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