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 바라기

경주 주변의 국보만나기 (6건-14, 40, 39, 30, 37, 236)

연꽃마을 2012. 8. 10. 15:51

몹시 더운 여름날, 가스 충전이 제대로 안될 정도였다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등 국보 만나기 여행을 시작했다

 

국보 제14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거조사는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오백나한의 모습이 모두 다르고 익살스런 얼굴 표정, 정겨운 모습들이 많았다

거조암까지 차량으로 이동 가능하다. 비구니스님이 주신 달다한 약식, 배고픈 시간에  감사했다.

 

 

 

 정면에선 한컷에 담을 수 없어 아쉬웠다.

 

국보 제40호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정혜사지 십삼층탑은 영천에서 양동마을로 나오는 길에 옥산서원 근처에 있습니다.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비교적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층을 크게 부각시킨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으로 인해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국보 제39호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나원리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가운데부분의 조각을 아래층은 3개씩, 위층은 2개씩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경쾌함을 실었고,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잘려나간 찰주(擦柱: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짜임새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5층석탑으로, 탑이 지니고 있는 듬직한 위엄에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청신한 기품이 잘 어우러져 있다. 높은 산골짜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나원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구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경북 경주시 분황사 구황동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국보 제37호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경주구황리 삼층석탑"이라는 예전 명칭이 그대로 써 있었다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아진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탑은 이중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1943년 이 탑을 해체수리하였을 때 제2층 옥개석내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금으로 만든 여래입상(如來立像), 다수의 유리구슬, 팔지, 금실 등이 발견되었다며, 사리함 뚜껑 내면에 새겨둔 글자를 통해 이 탑에 대한 내용과 발견된 유물의 성격을 알수 있다. 즉 이 탑은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691년에 돌아가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孝昭王)이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이듬해(692)에 세웠으며 효소왕이 돌아가자 성덕왕(聖德王)이 성덕왕 5년(706)에 앞서의 두 왕을 위해 사리(舍利), 불상(佛像) 등을 다시 넣고 아울러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세를 기원한 것이다. 탑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으며 높이는 7.3m이다.

 

 

 

국보 제236호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

장항리사지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마련된 절터로서, 절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마을의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지라 부르고 있다. 이 곳에는 현재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1923년 도굴범에 의해 붕괴된 것을 1932년에 복원이 가능한 서탑만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동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지붕돌만 남아있으나, 서탑은 약간 소실된 것을 빼고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서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으며,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을 본떠 조각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 몸돌의 각 면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는 한 쌍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고,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다. 5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탑의 1층 몸돌 각 면에 한 쌍의 인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것이 특이한데, 이러한 현상은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이 탑의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다.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탑의 네 면에 문을 걸어 잠그고 탑을 지키는 인왕상도 조각했다. 탑 속에 얼마나 귀한 것을 간직했길래....... 

 

 

 동탑은 1층 탑신과 5개의 지붕돌만 남아있다.

 

 

 불상을 놓았던 대좌가 남아있다. 4곳에서 동물, 네곳에서 신장을 조각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