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 도동서원(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6)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488호 도동서원입니다. 환원당 김굉필선생을 모시고 있지요. 도동이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래요.
김굉필선생은 어렸을 때 쬐끔 개구졌다고 하는데 함안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의 제자가 되면서 '소학'에 매료되어 드디어 동방 5현의 유학자가 되신 것이지요. 그러나 김종직의 수제자라는 이유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폐위하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관련된어 있던 사람들을이 화를 당하는 무오사화 때 함경도 휘천에 유배되었고, 갑자사화 때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51세, 돌아가실 때엔 조금의 흔들림이 없이 천연하게 형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입구에는 "김굉필나무"라고 불리는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그분의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이 분도 사당에 모셔져 있습니다)가 서원을 재건한 것을 기념하여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서 "행단강학"을 열고, 가르침을 폈기에 서원을 지으면 기념 식수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은행나무는 김굉필선생님을 흠모하며 사당쪽을 향하여 허리를 숙인 듯이 땅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요.
수월루는 "찬 강물을 비추는 밝은 달" 이라는 주자의 시에서 따왔답니다.
모란이 핀 계단식 화단을 지나면서 도동서원의 교문역할을 하는 "환주문"입니다. 주인을 부르는 문, 나의 주인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을까요? 169cm의 높이라서 갓을 쓰고 들어 가려면 허리를 숙여야 하고, 좁아서 옷길을 가지런히 모아야 하며, 발아래 밉지 않게 놓여진 연꽃돌에 혹시 걸려 넘어질까봐 발밑을 살필 수 밖에 없습니다. 겸손하라는 것을 말로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환주문 지붕은 사면입니다. 절병통을 슬쩍 올려 놓아 물이 새는 것도 방지하고 화려하지 않은 멋도 부렸습니다.
환주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 중앙에는 강당인 중정당이 있습니다. 바깥에 걸린 편액은 퇴계선생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며( 김굉필의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는 이황의 제자였습니다. 퇴계선생이 9개의 서원에 친히 편액을 써 주었는데 살아 계셨으면 도동서원에도 써 주셨을 것이라며 스승을 생각하여 모각한 편액을 걸었다고 합니다) 안쪽에 걸린 검은색 바탕의 편액은 사액받은 편액입니다. 민흘림 기둥의 위에는 "상지"흰띠가 둘러져 있습니다. 최고의 학자를 모시고 있는 사원이라는 자부심의 표식이지요. 지나가는 사람들도 낙동강의 배들도 이 상지가 보이면 예를 표하고 지나 다녔다고 합니다.
도동서원은 북향 건물입니다. 아마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 지형을 취하려면 북향으로 지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입니다. 실제로는 동재가 있는 방향은 서쪽이고 서재가 있는 쪽이 동쪽입니다. 그러나 보통 서원 건물은 강당에서 내다보는 좌측을 동재, 우측을 서재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동재는 선배들이 거처하는 '거인재'이고, 서재는 후배들의 공간 '거의재'입니다. 선배들의 집에는 쪽마루도 있고 고급진 원기둥에 창문을 두어 밝게 하고 나무 벽채를 썼습니다. 서재에는 사각기둥에 창문도 없고 흙으로 마감한 벽채이니 선후배의 차이도 있었군요.
중정당의 축대를 살펴봅니다. 축대의 돌들은 색깔과 재질과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 환원당을 모시는 서원을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돌들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4각형, 6각형도 있고, 12각형도 3개가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하나만 보이네요. '동입서출'을 나타내는 세호라고 불리는 다람쥐와 꽃문양도 있고요, 화재와 물 다스림의 으뜸인 용머리도 네개가 있는데 하나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모조품입니다. 비오는 날엔 빗물에 젖은 이 축대의 돌들은 무척 아름답다고 합니다.
중정당 천정의 매력은 자연 그대로라는 점이었습니다. 좀 삐뚤면 어떻습니까 덜 다듬어진 것들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군요. 모두가 잘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백의 미학, 모자람은 여백입니다. 중정당 뒷쪽으로 계단이 보입니다. 사당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도동서원은 한 줄기 길로 이어져서 양쪽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도동서원의 또하나 특색은 중정당 가운데 정료대가 있습니다. 야간 행사를 중요시한 탓이지요.
사당으로 오르는 정원은 계단식입니다. 배롱나무와 모란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암기와와 수막새로 한껏 멋을 낸 이 토담도 보물로 지정된 담장입니다. 담장의 수막새에는 "만력 33년 3월에 서원에서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진 것도 있다고 하는데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못 들어가는 사당 안에 있는지 ㅠㅠㅠ
나즈막한 굴뚝이 보기 좋습니다. 장판각은 공기가 잘 통하도록 지어져 있습니다.
제향공간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오른 발 먼저 올라가고 왼 발을 따라 올라 디디는 "취족"의형태였다고 합니다.
문틈으로 들여다 보니 사당 마당에 작고 예쁜 석등이 있습니다. 밤에 있을 행사 때문이겠지요.
제물들을 올려 놓고 잘 살펴보던 곳이지요.
전사청도 아주 멋진 한옥입니다. 수리하여 체험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옆에 아주 조금 보이는 지붕은 비각의 지붕입니다. 김굉필선생의 신도비가 있는 곳인데 비각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이 잠겨 있어서 신도비는 들여다 볼 수도 없습니다. 귀부가 쌍수로 만들어진 모양으로 우리나라에 몇 기 밖에 없는 것이라기에 꼭 보고 싶었거든요. 왜 이렇게 창살로도 들여다 볼수 없게 감춰 놓은 것일까요? 아무리 귀중한 것도 보고 즐겨야 좋은 것이지...... 여러 사람들에게 이 분의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신도비를 세우는 것일텐데 이 비석은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것일까요? 담장 문부터 콕 채워 놓고, 비각 속의 비를 들여다라도 볼 수조차 없게 만들어 놓는 것이 성리학을 시문중심이 아니라 의리(인간의 본성) 중심으로 실천했던 이 분의 뜻일지 궁금해 집니다. 바깥에 커다랗게 다시 비를 세우고 내용을 써 놓았다고 하는데 그 높고 빼곡하게 쓰여진 긴 글을 목이 아프게 쳐들고 읽어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기준을 알 수가 없습니다 ㅠㅠㅠㅠ
위 글에는 제대로 몰라서 혹시 잘못된 내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뜻 있으신 분, 댓글로 바로 잡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