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부론면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
지광국사 현묘탑비 설명은 국보바라기에 있어요
http://blog.daum.net/kimyoungkum/15372847
링크가기 싫을 때 읽습니다
법천사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법상종 사찰로 명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 곳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지광국사 현묘탑비와 법당터 및 석탑의 일부 등이 남아 있으며, 주면에는 이 절터에서 나온 석재 들이 흩어져 있다. 절터의 동편 산기슭에는 지광국사의 부도를 모셨던 탑전지가 남아 있다. 부도는 서울로 옮겨졌으나 탑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탑전지는 높게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왼쪽의 건물 터 위에는 기둥을 받치던 돌인 주초석, 불상의 뒤를 장식하던 광배, 계단 사이를 장식하던 대담하고 화려한 조각의 답도석, 그리고 예배를 드리던 단인 배례석·석탑재 등 이 곳에서 출토된 석재를 모아 놓았다.
이 절에 관하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928년(경순왕 2년)으로, 신라 하대에 이 지역의 대표적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관용, 지광국사, 정현, 덕겸, 관오, 각관 등 유명한 승려가 계셨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유방선이란 학자가 이 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며, 이 때 한명회·서거정·권람 등이 그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智光國師碑에 나타난 高麗의 龍華世界 저자명김대식 학술논문
古文化. 제70집 (2007년 12월), pp.17-34 韓國大學博物館協會 2007.12.31. 정간열람실(524호)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탑비로 국보 59호로 탑비와 함께 조성된 지광국사현묘탑 역시 고려시대 부도탑의 걸작으로 국보 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광국사 해린은 중소호족 출신으로 각고의 노력을 통해 71세 때에 현화사 주지가 되고 75세에 이르러 국사에 오른 인물이다. 입적 후 조성된 그의 부도탑과 탑비는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러한 탑비가 조성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대장경의 조성 혹은 완성에 그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 외에도 만년에 맞아들인 당시 최고의 문별귀족 출신의 제자 소현이 그의 탑비를 조성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지광국사비의 용화세계는 현재까지 알려진 변상도을 비롯한 불화나 여러 사경도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아를 표현한 것이다. 瑞烏 네 마리가 노리는 운문을 지나면 穹窿(궁륭)으로 보이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아래는 13천을 표현한 13개의 산(山)이 있고 그 중심에 우뚝선 하늘인 도솔천이 있다. 그 도솔천 위에 용화수가 서있다. 좌우로 비천이 용화수를 향해 수노를 들어 예를 행하고 있다. 용화수 주위는 해와 달이 도는데 좌측의 달에는 토끼(항아)가 계수나무 아래에서 두꺼비와 함께 디딜방아를 찧고 있다. 우측의 해에는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용화수는 보룡의 문양으로 된 나무 기둥에 용머리 모양의 꽃이 피어있고, 아래에는 제강주가 달려 있다. 지광국사비의 용화세계는 미륵이 성불하는 용화세계와 관련된 모든 내용이 문양으로 새겨져 있다. 지광국사는 고려의 최고 전성기인 문종대에 활동했고, 또한 고려인들이 가장 신성시한 대장경의 간행을 주도한 인물이다. 당시 고려인들은 그의 탑비의 전액 위에 그가 용화세계의 주인이라는 최대의 존경을 담은 그림을 헌상했다. 이는 고려인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유토피아인 것이다. 이는 밝혀지지 않은 고려문화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1.답도란? 임금이 가마를 타고 오르는 계단으로 밟는 길이라는 뜻을 지닌 답도(踏道)라고 명칭을 붙였습니다.
2. 답도의 무늬는? 구름 속에서 날개를 활짝 펼친 봉황새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3. 그 무늬가 새겨진 이유? 봉황이 태평성대를 의미하는데 그것을 기원한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