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안동,영주에서 만나다(국보4건-77,16,201,282, 다시보기 15,16, 17,18,19)
이 글에 있는 국보는 모두 8건, 그러나 "국보 네 건"이라고 한 것은 이미 다른 곳에 올려져있는 것을 빼고 하는 말입니다.
문화재의 설명들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거나 설명 표지판에서 퍼왔습니다.
국보 제77호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義城 塔里里 五層石塔)
경북 의성군 의성군 금성면 탑리
탑리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이다.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가운데기둥과 모서리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 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서 전탑의 조성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경북 안동시 안동시 법흥동 = 신세동 칠층전탑이라고 적혀 있는 곳도 많다.
이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법흥동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탑 주위로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위로 7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하였다.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 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하였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이 일대의 지명< 地名 >을 법흥리< 法興里 >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 法興寺 >에 세워진 전탑< 塼塔 >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6.4m 이다. 단층< 單層 >의 기단< 基壇 >은 팔부중상< 八部衆像 >과 사천왕상< 四天王像 >을 조각한 판석< 板石 >을 세워 만들고 탑신부< 塔身部 >는진회색의 무늬 없는 전< 塼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전의 크기는 길이가 약 28cm, 폭 14cm,두께가 6cm 이다. 각층 지붕 윗 면에는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이는 목탑< 木塔 > 양식< 樣式 >의 수법< 手法 >을 모방< 模倣 >하여 전탑이 조성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탑의 윗 부분에는 금동제< 金銅製 > 상륜부< 相輪部 >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어졌다.
2024년 7월 25일 안동법흥사지 칠층전탑을 보러 다시 갔어요.
탑 옆으로 기찻길이 있어서 흔들림 영향을 받을까봐 참 안타까웠는데, 고맙게도 기찻길을 아주 멀리 이동시켜 놓았습니다. 참 다행이에요. 잘 보존된 탑의 새 얼굴을 만났습니다.
이른 아침에 찾아간 부석사, 다시만난 국보들.......국보는 아니라도 날씬한 당간지주가 반깁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당간지주"라는 표현에 이의를 달 수가 없지요.
국보 제18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나는 이 석등을 엄~~~청 사랑합니다. "사무치는 마음으로 가고 또가고 가고 또 가고...." 정말 그렇습니다.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으로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숲길,
지난 겨울 너무 추워 푸르던 산죽들이 모두 얼어 죽었답니다. 아! 봉황은 어디에 알을 낳을까요?
선비화는 여전히 철창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위쪽은 좀 벗겨내도 되련만........
의상대사 지팡이 선비화, 많이 자라 있었습니다.
조사당의 옆 모습은 느긋하고 안정되고 아름답습니다. 오래도록 바라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국보 제201호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奉化北枝里磨崖如來坐像)
경북 봉화군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지림사 경내에 계십니다.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국보 제282호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경북 영주시 흑석사
제282-1호 불상(佛像) 경북 영주시 흑석사 (영주시 이산면 흑석리)
흑석사는 삼국시대 석조마애여래상과 통일신라 때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이 있는 절로 늦어도 통일신라 때 창건된 절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1945년 다시 중창되었는데, 1990년대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아미타불상 몸체 안에서 서적류와 직물을 비롯하여 5곡, 5향, 보석류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불상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조의 좌상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얼굴은 계란형으로 갸름하고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아담하다. 무늬가 없는 두꺼운 옷을 양 어깨에 걸치고 아미타여래의 손 모양을 취하고 있다. 머리 모양과 왼쪽 팔, 배 위로 나타난 옷의 주름에서 조선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불상과 함께 발견된 다른 기록들에 나타난 조성 연대와 일치하는 것으로, 기록 내용에 따라 조선 세조 4년(1458)에 법천사의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전기의 목불로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보물 제 681호 석가여래 좌상(통일신라시대), 마애여래삼존불(고려시대)- 흑석사 사찰 뒤쪽에 계십니다.
(영주시청 홈피 설명과 문화재청 설명은 조금 다릅니다- 조성된 시대가....)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