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 바라기

국립경주박물관 국보들 (4건-189,28,195,38)

연꽃마을 2012. 8. 10. 16:10

박물관을 여러 차례 갔으나 늘 단체로 이동하기에 보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볼 수 없었다. 더운 여름 날 시원한 박물관 안에서 쉬엄쉬엄 보려했지만 오후 6시가 되자 문을 닫는 다고 방송에 쫓기듯 나와야 했다. 금동약사여래입상(미술관에 있었다)을 실컷 못봐서 아쉽다.

 

아래 설명들은 문화재청 홈피에서 퍼와서 요약했어요

 

국보제 189호 천마총 관모는 여러 번 본 적은 있었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모자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모(金帽)란 금으로 만든 관(冠) 안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높이 16㎝, 너비 19㎝인 이 금모는 널<관(棺)> 바깥 머리쪽에 있던 껴묻거리(부장품) 구덩이와 널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각각 모양이 다른 금판 4매를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위에는 반원형이며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진다. 아랫단은 활처럼 휘어진 모양으로 양끝이 쳐진 상태이다. 윗단에 눈썹 모양의 곡선을 촘촘히 뚫어 장식하고 사이사이 작고 둥근 구멍을 뚫었으며, 남은 부분에 점을 찍어 금관 2장을 맞붙인 다음 굵은 테를 돌렸다. 그 밑에는 구름 무늬를 뚫어 장식하였고 또 다른 판에는 T자형과 작은 구멍이 나 있는 모양의 금판이 있다. 머리에 쓴 천에 꿰매어 고정시킨 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195호 토우 장식 장경호

얼마전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도 보았다. 복사품이라는 표시는 모두 없었다. 같은 것이 여러 개일까?

도마뱀 모양등 여러 가지 토우들이 아름 생동감있다.

 

국보 제38호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립경주박물관내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을 조립식으로 짜 맞추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퉁이에서 또렷이 들려있어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밑면에는 계단 모양으로 5단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에서 시작되어 이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국보 제28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상체를 뒤로 젖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단전과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등신대(等身大)의 중후한 인상을 풍겨주는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채색 금동불상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서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비례에 가까우며, 둥근 상호(相好)에 긴 눈썹, 가는 눈, 오똑한 코, 작은 입, 양볼의 살, 턱의 군살 등이 우아하게 묘사된 상(像)이다. 가슴은 비교적 넓고 양감(量感)없이 밋밋한 편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밀착된 법의(法衣)로 잘 나타나고 있다. 두손은 후보(後補)한 것이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팔의 위치로 보아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서 약호(藥壺)를 받들었던 듯하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가슴에 U자형 주름을 여러 단 잡았으며, 한단씩 걸려 주름의 선을 가운데에서 끊은 것은 두다리의 윤곽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두팔에서 내려진 옷자락과 발 위에 묘사된 옷자락은 묵중하여 중후하게 보이며 형태적 특징과 함께 이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상(像)의 뒷면에는 구멍이 나 있고, 광배(光背)를 달았던 꼭지가 남아 있다. 조성연대는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